영화, K드라마 리뷰 / / 2024. 2. 27. 21:01

영화 "사바하"에서의 녹야원 탄생, 종교적 선과 악, 빠져드는 줄거리

 

영화 포스터

선은 타락하여 악이 될 수 있으나 악은 선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악은 반드시 응징해야 할 대상 기독교식 세계관과 욕심을 가지는 순간 악이 만들어지며 따라서 선과 악은 언제든 서로 뒤바뀔 수 있고 악은 응징의 대상이 아니라 교화와 깨우침의 대상이란 불교식 세계관이 반영된 사바하는 마지막까지 누가 악마고 누가 부처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 라인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녹야원의 탄생의 상징성과 감독의 관점에서의 선과 악, 반복해서 볼수록 깊이 있는 스토리와 짜임새에 녹아들게 될것입니다.

 

녹야원의 탄생

지금으로부터 약 2600여 년 전에 네팔에서 태어난 싯다르타 고타마 왕자가 있습니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목격한 뒤 이 네 가지 큰 고통을 세상에서 없앨 방법을 찾으려 했던 그는 이를 위해 29살에 출가하여 이후 6년간 고행하다가 마침내 보리수 아래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는데요. 고통은 생로병사 포함 총 여덟 가지로 분류 갈 수 있으며 이러한 고통으로 이루어진 게 인생이란 걸 알게 된 스타르타는 이 여덟 가지 고통이 생기던 원인이 욕심과 집착 때문이며 욕심과 집착을 없애면 고통이 사라져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진리와 이를 위해 여덟 가지 수행법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탈의 즐거움을 홀로 누리던 시타르타는 자신의 깨달음으로 끝없는 윤회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부처가 되는 프로세스인 고집멸도 사성제를 기본교회로 삼는 불교를 만들게 되었는데, 마침내 법의 바퀴를 굴려 자신의 깨달음을 처음으로 설파한 장소가 바로 녹야원 우리말로 사슴 동산이었고 이때부터 사람들은 스타르타를 붙여 즉 깨달은 자 또는 눈을 뜬 자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석가모니 부처의 사성제로부터 시작된 불교의 세계관으로 인해 불교인들은 악한 자와 선한 자를 구분할 때 욕심과 집착의 유무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불교에선 악마라도 욕심과 집착을 버리면 순간 부처가 될 수 있었으나 부처라도 욕심과 집착에 사로잡히면 그가 바로 악마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영화 사바는 바로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에 바탕으로 하여 양손의 각각 6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태어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요. 1899년에 태어났던 그가 큰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마침내 생로병사를 초월한 불로장생의 활불 즉 살아있는 부처의 경계 올랐으나 1985년에 티벳의 라마로부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전해 들은 뒤 이때부터 새에 대한 집착과 욕심에 사로잡혀 악마가 되어버렸다는 내용이 여호와의 핵심 줄거리입니다.

 

감독의 관점에서의 종교적 선과 악

장재영 감독은 불교식 세계관을 등장시켜 관객을 예상치 못한 반전에 빠뜨렸는데요. 대표적인 장치 바로 뱀의 활용이었는데. 영화는 극해 중반까지 순수한 악을 상징하는 기독교식 뱀의 이미지로 관객을 속인 뒤에 후반부에서는 좌선에 든 부처님을 몸으로 보호했던 수호자로서의 불교식 뱀 이미지 가져와 극적 반전을 성공시켰습니다. 한편, 두 종교의 서로 다른 선악 개념은 이 두 작품의 스토리 라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영화 사바하는 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 중 이슬람교도들에게 아내와 딸을 살해당했던 박웅재 목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절대적 기준으로 존재해야 할 선악 구분이 종교나 믿음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의되었을 때 어떤 끔찍한 비극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다양한 상징과 의미로 세련되게 보여주었습니다. 박웅재 장지영 감독은 박웅재 목사를 통해서 한편으로는 신을 믿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회의적인 태도를 박웅제 목사를 통해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결론이 절대 무신론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 현실 세계에 신의 강림은 두 번이나 이루어졌어요. 단지 우리는 적절한 때에 그들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신은 있긴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그들의 존재를 갈구하고 있다는 식으로 영화의 결론이 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장재영 감독은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어딘가에 신은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남겨놓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 반복해서 복수록 깊이 빠져드는 영화 줄거리

사바의 이야기는 1899년 김풍사 김제석의 탄생으로 시작이 됩니다. 영화에서 일본의 밀교 신자들과 일본 순사들 틈에서 엎드려 있던 김제석의 옛 사진을 보면, 김제석은 이때에 이미 경지에 이른 깨달음을 얻어서 살아있는 미륵, 그러니까 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되고 그로 인해서 불사의 몸을 얻었을 것입니다. 영화의 현 시점이 2015년 기준으로 현재 그는 40대 초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그가 불사의 몸을 얻은 이때는 그의 탄생인 1899년으로부터 약 40년 전후가 지난 시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 스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살아있는 미륵이 된 김제석은 실제로 세상에 이로운 일들을 많이 펼쳤습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독립군을 지원하거나 유출된 유물을 직접 회수하는 등 현실 세계의 실질적인 문제들까지 선한 영향력을 확장시킵니다. 그런데 국내의 정치적인 문제로 그의 활동이 점차 위축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근데 이것은 아마 해방 이후에 몇 정권 몇몇의 정권들이 나라의 빠른 발전을 위해서 근면성실을 최대 미덕으로 강조하는 기독교적 교리를 이용해서 전 국민을 통합하고 국가 발전을 빠르게 이루는 방향을 채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세를 늘린 시기가 바로 해방 이후에 몇 명, 몇 정권의 집권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서는 당연히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는 불교 지도자 김제석이 상당히 눈에 가시였겠죠? 그래서 김제석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압박에 못 이겨 모든 종교적 지위를 내려놓고 사회 환원 활동에만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정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무엇에도 집착과 욕망을 갖지 않으며 살아있는 미륵으로서 중생을 구제하는 데에만 훌륭하게 집중해 왔습니다. 그런데 1985년 밀교의 예언가이기도 했던 이 내충텐파라는 사람은 살아있는 미륵 김제석을 직접 만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본 미래를 그에게 예언을 해주게 됩니다. 그는 김제석에게 태어난 지 100년이 된 시점에 그러니까 1999년에 김제석을 죽일 존재가 김제석의 고향에서 태어날 것이란 예언입니다. 그때 김재석의 눈빛은 아주 분명하게 흔들립니다. 그러니까 불사의 몸을 얻은 자도 자신이 죽게 된다는 예언을 들은 순간 김제석은 자신도 모르게 생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갖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집착과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한 번뇌 이 구절은 영화 안에서 해안 스님의 입을 통해서 직접 언급이 되는데요. 내충템파의 재방한을 준비하던 해안스님은 불괴는 악의 없다. 다만 집착과 욕망으로 인한 번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거는 불교적 세계관에서 집착과 욕망으로 인한 번뇌를 가진 존재는 절대로 성불을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일 지라도 짐승의 행위를 하면 본인 내면에 머물러 있던 부처의 모습을 잃게 된다는 것이 이런 불교에 선악이 없는 연기론적 세계관인 것입니다. 고정된 선악이 없다는 것 모든 삼라만상이 홀로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서로에게 의지해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실시간으로 존재하는 것 이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런 연기설은 총 12개의 항으로 간편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처가 된 사람은 연기설 12항을 몸에 체화시켰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 12개의 손가락을 가지게 되는 것 이런 설정이 나온 것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이 없어진다라는 것. 이게 바로 연기설의 12항 중 몇 가지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 우주의 삼라만상에는 모두 이러한 순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김제석이 살아있는 미륵이 된 김제석이라 할지라도 1999년에 태어나는 존재로 인해서 설사 죽음을 실제로 맞이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연기설에 의해 규정된 우주의 진리이자 법칙이기 때문에 김제석은 그걸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김제석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을 받고 자신을 보필할 내 아들 사천지황을 위한 네 개의 법당을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자신의 아주 충실한 수족으로 포섭하기 위해서는 그들한테 거대한 종교적 구원을 제시를 해줘야만 하는데 이때 김재석이 그들한테 제시했던 종교적 구원이 바로 '자네가 비록 너의 손으로 부모를 죽인 짐승으로 태어났지만 네가 지금부터라도 하늘의 뜻을 대신한다면, 너 역시도 지금은 악이지만 나중에는 부처로 승천하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81 마리의 뱀을 모두 제거한 너희가 승천해서 부처가 됐을 때 너희들의 신도가 앞으로도 네 개의 법당에 머물면서 너희들을 계속 섬겨줄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는 명분을 제시해서 한낮 소년범에 불과한 그들 자신이 나도 위대한 신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삶의 희망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쌍둥이 중 언니는 사천지왕들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 부모님을 모두 죽여버린 짐승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제석은 짐승 역시 부처가 될 수 있다고합니다. 즉 이건 사천지왕과 마찬가지로 짐승으로 태어난 쌍둥이 언니도 앞으로 그녀가 어떤 행위를 하는가에 따라서 그녀 역시도 부처가 될 수도 있다는 그런 불교적인 논리를 영화적으로 던져주고 있습니다. 쌍둥이 언니는 새로 이사 온 시골 마을에서도 주변의 소들을 모두 죽여버리게 만들 정도로 16년 동안 끊임없이 악의 기운을 심각하게 퍼뜨려 왔었습니다. 그러나 쌍둥이 언니는 사실 뱃속에서 동생의 다리를 갉아먹은 적이 있긴 하지만 사실 이후에는 결코 동생에게 해코지를 한 적이 직접적으로 해코지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것에게는 분명 악이 깃든 채로 태어났어요. 그러나 쌍둥이 언니 그것은 광목에게서 자신의 동생을 지켜줬던 것처럼 그리고 김제석에게 속아서 악행을 저지르며 괴로워했던 광목을 매일 밤 위로하고 지켜줬던 것처럼 사실 쌍둥이 언니는 16년 동안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깃든 악과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싸워오기도 했다는 겁니다. 불교에서 수행은 고통의 과정이죠. 왜냐하면, 나의 육체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모든 육체적 욕망과 집착을 이겨내고 계속해서 오롯이 깨달음에만 정진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너무나 큰 고통인 겁니다. 짐승로 태어난 쌍둥이 언니도 동일하게 수행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이 주변에 끊임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스스로 목격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 속에서 16년을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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